< 13 > 일리노이
< 김용일 기자 > 일리노이, 링컨의 고향이자 중부의 ' 대표 선수 ' 일리노이주는 크기도 작지 않지만 인구 에 있어서도 50 개주 가운데 5 위를 차지하 고 있는 미중서부의‘ 대표선수’ 다. 나아가 시카고는 뉴욕, LA 에 이은 미국 세번째 대 도시로 미대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. 일리노이의 태동은 주변 주들과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. 17 세기 후반, 여러 유럽국 들 가운데 프랑스가 가장 먼저 오대호 연 안에 발을 디디는 과정을 거쳐 정착지가 만들어지고, 먼저 깃발을 꽂았다는 이유 로 프랑스령으로 귀착이 됐다. 그러나 이 는 물론 유럽식‘ 금 긋기’ 일 뿐 일리노이 일대에는 이미 다수의 아메리칸 인디언 부 족들이 저마다 자기 땅으로 여기며 자리잡 고 있었다. 인디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리노이는 주변 위스컨신, 미시간 등과 패키지로 묶 여 1717 년 프랑스 땅으로 방점이 찍힌다. 이후 일부 프랑스인 정착자들이 늘어나고 요새들도 구축됐지만, 프랑스가 영국과의 식민지 패권에서 밀려나면서 일리노이는 1763 년 1 차 파리 조약을 통해 소유권이 영 국으로 넘겨졌다. 겉으로는 커다란 땅 덩어리의 이관이었 지만 이 무렵 일리노이 일원에 거주했던 정착민수는 고작 1 천명 안팎에 불과했다. 선교사와 모피상, 그리고 일부 영국군에 소수의 이주민 등이 전부였다. 그나마도 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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가운데 일부 주민은 영국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며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부 스페인 령으로 이주하기도 했다. 결국 미국은 말 그대로 덩그러니 일리노 이 땅만 넘겨 받았을 뿐이었다. 일리노이는 당연히 독립전쟁의 전화( 戰 禍) 에는 휩쓸리지 않았다. 그러다가 1783 년 미영조약( 파리조약) 체결과 함께 다시 미국 영토로 낙점됐다.
일리노이는 미국땅으로 바뀌었지만 개 발이나 주민 정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. 1800 년 인구조사에서 일리노이의 주민수는 2,458 명인 것으로 집계됐다. 독 립전쟁 이후 30 여년 가까이 지나서도 인구 가 2 천여명 대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미개 발, 아니 무개발( 無開發) 의 오지 였다. 일리노이는 1809 년 일리노이 준주를 거 쳐 1818 년 12 월 3 일 미합중국의 21 번째 주 로 편입됐다.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일리 노이의 산업 전반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 다. 지금은 미국의 3 대 도시로 부상한 시카 고 조차 거주자가 수백명에 불과한 호수변 한촌( 閑村) 에 불과했다. 그러나 일리노이는 석탄, 석유와 같은 천 연자원이 풍부했고 옥수수, 밀, 콩과 같은 핵심작물이 대량 생산될 수 있는 대평원 을 가지고 있었다. 일리노이의 이같은 잠 재력은 1825 년 이리 운하 개통되면서 폭발 적으로 현실화됐다. 이리 운하를 통해 대 서양과 오대호 연결되면서 일리노이를 비 롯, 오하이오, 미시간, 위스컨신 등이 거대 한 교역 네트웍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. 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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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 1848 년 미시간 운하가 뚫리자 수로망은 더욱 확대돼 미시시피강 수역의 산물들까 지 대서양 진출이 가능하게 됐다. 이러한 인프라가 가동되자 일리노이의 광공업, 농업, 목축업 등은 말 그대로 폭증 세를 보였다. 미동부와 유럽이라는 대소비 시장을 잡게 되면서 철강, 석탄, 곡물, 낙 농, 육우, 과일에서 화초에 이르기까지 산 업 생산이 급피치를 탔고 산물들은 운하망 을 통해 대량으로 운송됐다. 이렇게 되자 뉴욕 등 동부지역에서 이주 자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. 일리노이 인구 는 매 10 년 마다 서너배씩 늘어났고 1830 년에는 15 만명을 넘어서게 됐다. 운하 외 에 1850 년대 들어 철도선들도 부설되면서 개발은 더욱 활성화됐다. 그 결과 일리노 이는 오대호 연안의 미국 중공업 지대 선 도하는 핵심 주로 부상했고 특히 시카고는 물산의 집산지이자 물류의 거점으로 급격 히 성장해 나갔다.
일리노이의 존재감은 1861 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더욱 커졌다. 태어난 곳은 켄터키였지만 링컨은 일리노 이 주 하원 등을 거쳐 연방하원의원, 상원 도전 등 일리노이 정계를 발판으로 전국적 인 정치인으로 부상했다. 노예 해방 이슈로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일리노이는 당연히 북군의 주역이 됐다. 일 리노이 출신 참전 북군은 그 수가 연 26 만 여명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 지했다. 남북전쟁에 이어 1 차 대전을 거치면서 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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리노이는 군수산업의 부흥과 함께 다시금 역동적인 산업발전기를 맞는다. 일리노이 는 2 차 대전중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핵 연구와 개발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. 일리노이는 이같은 산업 기반을 토대로 각종 중공업, 제조업, 항공, 금융, 보험, 유통, 식품가공 등 거의 전 산업부문에 걸쳐 핵 심 기업들의 허브가 되고 있다. 시카고 선 물 거래소, 보험사 올스테이트, 미국 최대 항공사인 유나이티드 항공, 도매체인 K 마 트, 백화점 시어즈, 또 약품 체인 월 그린 및 맥도널드 등의 대기업들이 모두 시카고 지 역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.
일리노이는 정치적으로 확실한‘ 블루 스 테이트’ 로 분류된다. 뉴욕,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민주당의 아성이다. 1992 년 이래 대선에서 30 년 가까이 민주당 후보를 압도 적으로 밀어주고 있다. 대통령 선거인단수는 20 명으로 펜실베니 아와 더불어 공동 5 위를 차지, 정치적으로 메이저 주 위상을 갖고 있다. 일리노이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및 미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을 낳은 곳이고 링 컨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며 힐러리 클린 턴, 미셸 오바마, 켄터키 치킨의 창시자 샌 더스 등도 이 곳 출신이다. 중서부 지역에서 가장 진보적인 주로 꼽 히는 일리노이는, 남북전쟁 전후 남부의 많은 흑인 노예들을 북부와 캐나다 지역으 로 비밀리에 탈출시키는 것을 주도했던 지 하철도( Underground Railroad) 조직의 주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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